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리아 전쟁 (문단 편집) === 갈리아 전역에서의 싸움 === 최후의 대규모 저항이나 다름없었던 벨로바키족과 그 연합 부족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병력을 쪼개 각지에 파견했다. 이들 중 군대가 집중된 곳은 갈리아 남부에 살고 있었던 '''안데스족'''으로 이들은 로마와 동맹을 맺은 '''픽토네스족'''을 공격했다. 파비우스는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4개 군단으로 이들과 대치했다. 안데스족은 로마군의 전력이 강력한 것을 보고 퇴각을 시도했으나 이 첩보를 받은 파비우스가 기병과 보병을 모두 내보내 추격을 했다. 첫날엔 기병이 큰 전과를 거두었고, 다음날 밤엔 기병이 보병의 지원없이 깊숙히 안데스족을 추격했다가 기병을 섬멸하고자 한 안데스족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위태로워졌지만 군단병이 적시에 도착하여 이들을 격파했다. 한편 갈리아 남부 해안가에 있었던 로마 속주에 갈리아족의 일부인 '''카두키족'''이 침공을 개시하자 2개 군단을 이끌고 있었던 카니니우스가 이들을 추격했다. 카니니우스가 접근한 것을 안 카두키족은 절벽 꼭대기에 위치한 도시 옥셀로두눔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했다. 로마군이 포위를 시작하자 카두키족은 [[알레시아 전투]]때처럼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 밖에다가 진을 친 뒤 그곳에서 군량을 반입하고자 했다. 군단장 카니니우스는 첩보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뒤 군량 수송대를 급습해 격파했고, 곧바로 군대를 모두 내보내 카두키족의 진지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대승한 로마군은 즉시 도시 전체에 대한 포위에 들어갔다. 당시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이때 안토니우스는 재무관으로서 갈리아 전쟁 막바지인 8년째에 등장했다. 카이사르는 그를 유망하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군단병을 꽤 자주 이끌도록 했다. 그리고 갈리아 전쟁 이후에는 로마로 귀국하여 호민관에 당선되었다.]에게 15개 대대(1.5군단)를 맡기고, 벨가이인의 지역에 남겨둔 뒤 자신은 베르킨게토릭스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던 부족인 카르누테스족[*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대규모 반란때 로마인들을 최초로 습격함으로써 다른 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인 바 있었다.]을 방문하여 부족장이었던 구투아테르를 체포한 뒤 부하 병사들에게 넘겼다. 병사들은 그를 고문한 후 처형했다. 그 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기원전 45년 집정관)|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카니니우스가 포위를 한 옥셀로두눔의 경우,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사행동이었으므로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하기 위해 방문하자 모든 이들이 놀랐다. 카이사르는 옥셀로두눔 내로 흐르는 수원을 끊음으로써 카두키족이 물의 공급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카이사르가 강을 모두 차단하자 카두키족은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 성밖으로 나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들을 간단히 무찌른 뒤 수원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고, 카두키족은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항복한 카두키족 남자들의 양손을 자르는 엄벌을 내렸다.('''[[옥셀로두눔 공방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